문화와 생활

김명희가 뉴욕 대신 춘천 폐교를 택한 이유

기사입력 2026-05-13 13:37
 화가 김명희는 스스로를 정착민이나 방랑자 대신 '이동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앰뷸런트라 정의한다. 뉴욕 소호의 작업실과 강원도 춘천 북산면 내평리의 폐교라는 극단적인 두 공간을 오가며 보낸 수십 년의 세월은 그녀에게 이동 자체를 삶의 필연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서울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개인전 '깊은 시간'은 1980년대 뉴욕 시절의 드로잉부터 최근의 영상 작업까지 40여 점의 작품을 통해, 작가가 두 세계를 유영하며 축적해온 내면의 기록들을 입체적으로 펼쳐 보인다.

 

작가의 예술 여정에서 1990년 춘천 내평리 폐교로의 이주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남편 김차섭 작가의 건강 회복을 위해 선택한 오지 생활은 고립이 아닌 새로운 매체와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교실 구석에 버려진 칠판을 발견한 김명희는 이를 단순한 필기 도구가 아닌 시간의 흔적이 박제된 예술의 지지체로 삼았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해도 미세한 분필 가루와 낙서의 잔상이 남는 칠판의 속성은, 작가가 추구하는 '사라지지 않는 기억'의 은유가 되어 독특한 칠판 회화의 세계를 완성시켰다.

 


김명희의 칠판 회화는 어둠 속에서 빛을 길어 올리는 역설적인 방식을 취한다. 검은 바탕 위에 오일파스텔로 점과 선을 쌓아 올리며 직접적인 빛의 층위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일반적인 캔버스 작업과는 궤를 달리한다. 화면 속 인물들은 수학 공식이나 낙서의 흔적 위를 부유하듯 존재하며, 현실의 재현을 넘어 꿈과 기억의 경계를 넘나든다. 작가에게 칠판은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이미지와 중첩되는 다층적인 공간이며, 그 위에서 빛은 기억의 실체를 드러내는 유일한 도구가 된다.

 

작품 속 풍경과 인물들은 물리적인 시간을 초월한 감각으로 묘사된다. 수십 년간 고된 농사일을 해온 이웃 주민이 청년의 얼굴로 등장하거나, 실제 나무보다 물에 비친 그림자가 더 선명하게 강조되는 식이다. 이는 작가가 "삶의 실체는 기억"이라고 믿기 때문이며, 내평리의 사계절을 담은 연작 역시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작가의 머릿속에 축적된 시간의 감각을 형상화한 결과물이다. 사실적인 묘사보다 기억의 농도에 집중하는 이러한 태도는 관객들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서정성을 선사한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자화상 신작들은 작가의 일상과 기억이 더욱 긴밀하게 결합된 형태를 띤다. 김치를 담그는 부엌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 위로 지구본이나 비 내리는 영상 이미지가 겹쳐지는 구성은, 작가의 내면에서 흐르는 무수한 단상들을 시각화한 것이다. 특히 남편 김차섭 작가를 떠나보낸 뒤 완성한 최근작들은 부재의 슬픔을 집안일이라는 일상의 리듬 속에 녹여내며,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지점을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성찰하고 있다.

 

전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장우진 감독의 다큐멘터리는 작가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증명한다. 내평리와 뉴욕을 오가며 작가의 발자취를 기록한 영상은 김명희라는 예술가가 지닌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한다. 작가는 모든 곳이 집인 강한 사람이나 어느 곳도 집이 아닌 깨달은 사람의 경지를 동경하면서도, 여전히 뉴욕의 새벽녘에 내평리의 새소리를 그리워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녀에게 결국 집이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함께 머물렀던 그 모든 시간의 합이었음을 작품은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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